훈민정음의 반포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을 완성하였고, 3년 후에 이 사실을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렸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부터 양반이 아닌 백성들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줄곧 한자를 사용했다. 말은 우리말을 하고 글은 한자로 썼던 것이다. 한자 그대로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우리말을 적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아,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쓰기도 했다. 이를 향찰이라고 하는데, 주로 향가를 적을 때 많이 사용했다. 향찰은 쓰는 방법이 복잡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워 널리 쓰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향찰보다는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결국 한자를 아는 양반들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훈민정음』 서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백성들이 한자로 서로 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매우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어 평소 편리하게 사용하기를 바란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새롭게 만든 글자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책 이름을 가리키기도 한다. 세종은 1446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을 담아 새로 만든 글자에 대한 해설집을 펴내게 했는데, 그 해서집의 이름 역시 『훈민정음』 이다. 『훈민정음』 은 국보 70호로 등록되어 있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하다.
학문연구를 위해 설치된 기관
집현전은 학자양성과 학문연구를 위한 기관이었다.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경연은 왕과 유신이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유교적 교양을 쌓도록 하여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서연은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다. 집현전관은 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했으며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중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다. 집현전 학사들은 『훈민정음』을 펴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새로운 글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여, 훈민정음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