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VS 일본군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은 다시 힘차게 일어났다. 일제의 감시가 나날이 심해지자,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워진 사람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직접 싸웠다. 그러자 일본군은 1920년에 독립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해왔다. 대한독립군을 이끌던 홍범도는 북간도 지역에 있던 여러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힘을 모았다. 일본군을 봉오동 계곡으로 유인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한꺼번에 공격을 퍼부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봉오동전투’라고 한다. 봉오동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또다시 공격을 해 왔다. 이번엔 김좌진과 이범석이 이끌던 부대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와 힘을 합쳤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일본군이 독립군의 10배가 넘는 군사를 이끌고 왔다. 독립군은 하나로 힘을 합쳐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일본군에 비해 가진 무기가 부족하고 전투에 참여하는 군인도 턱없이 적었는데도 승리했다. 이 전투를 ‘청산리전투’라고 한다.
독립군을 이끈 사람들
일제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만든 군대를 ‘독립군’이라고 부른다. 독립군은 각 지역마다 여러 개의 부대가 있었는데, 그 수가 100여 개나 될 정도로 많았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대표적인 독립가 홍범도, 김좌진, 이범석, 지정천이 있다. 홍범도는 포수 출신으로 1907년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해서 1910년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키우고 이끄는 일에 전념했다. 김좌진은 고향에서는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운동을 주로 했다. 1911년에 군자금을 모금하다 일제에 체포되었고, 그 후 만주로 옮겨 가 독립군 부대를 이끌며 청산리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범석은 고등학교 시절 독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청산리전투에서 중대장으로서 큰 활약을 했다. 1941년에는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을 맡았고 해방된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지정천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서 지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에 만주로 건너 가 독립군에 참여했다. 한국독립군을 이끌었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소속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도 활약했다. |